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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음악계에서 지휘자는 장수하는 직업이라는 통념이 많은 것 같다. 실제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95세라는 최장수 기록을 가지고 있고, 80대까지 산 지휘자는 쌔고 쌨다. 자연사가 아닌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오르크 틴트너도 80대까지 산 바 있었고. 그리고 동양에서는 아사히나 다카시(朝比奈隆. 1908-2001)가 93세라는 아시아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사히나는 더불어 전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상임지휘자 생활을 한 인물로도 기록되는데, 1947년 직접 창단한 간사이 교향악단(현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을 타계할 때까지 계속 지휘한 것이다. 무려 52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다.
이는 빌렘 멩겔베르크+암스테르담 왕립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기록이나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재임 기록을 능가하고도 남을 정도.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아사히나가 타계한지 5년 가까이 되는 지금도 오사카 필 하면 아사히나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비교적 늦깎이로 지휘자가 된 아사히나는 '대기만성형' 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황소걸음 인생과 걸맞게 그의 주요 레퍼토리는 독일/오스트리아 낭만파 음악에 집중되어 있는데, 카라얀이나 요훔 보다도 더 많이 녹음한 베토벤과 브루크너,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은 지금도 일본은 물론이고 종주국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을 정도다. 푸르트벵글러의 강한 영향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음악 해석 방식은 낭만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올드 타입 팬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내가 처음 접한 아사히나의 CD는 EMI에서 나온 R.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시리즈)이었는데, 슈트라우스 자작자연반을 비롯해 몇 장의 음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내 레퍼런스 음반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무편집 하룻밤 실황녹음 특유의 에너지에, '동양 지휘자가 이렇게도 휘젓고 다닐 수 있구나'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주였는데, 군대에 있는 동안 다음 타깃으로 잡은 것이 아래의 두 CD였다. 그리고 결국 현충일에 신촌 M2U 레코드점에서 지르고 만 것이었다.
ⓟ 1996 Pony Canyon Inc.두 장 중 가장 기대한 것은 슈만 교향곡 3번 '라인' 의 음반(포니캐년. 위 사진). 슈만의 교향곡 네 곡중 1번 '봄' 과 4번은 푸르트벵글러의 녹음이, 2번은 틴트너의 녹음이 성서 역할을 하고 있는 차에 3번은 뭐가 인상적일지 고민하면서 산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카라얀이나 브루노 발터의 연주를 듣기는 했지만, 카라얀은 지나치게 윤색되어 있고 발터는 의외로 좀 성급한 것 같아서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아사히나+오사카 필의 녹음은 1994년 10월 17일에 오사카 페스티벌홀에서 열린 정기연주회 실황인데, 속지의 우노 코호-일본의 음악 비평가이자 지휘자-가 쓴 전형적인 '일본식 오버센스' 평론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전세계적으로 슈만 교향곡의 연주는 상당히 뜸한 편인데, 연주를 하더라도 욕을 얻어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놈의 허술한 관현악법과 구성의 미흡함, 내면 표현의 난해함이 수많은 지휘자와 관현악단이 쓴잔을 마시는 중요한 원인인데, 국내에서도 몇달 전 신예 지휘자 구자범이 서울시 교향악단과 4번을 연주했다가 '밋밋한 연주' 라고 악평을 받은 바 있었다.
아사히나 또한 슈만 교향곡은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았는데, 3번의 경우 이 음반이 최초 레코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80대 중반이었던 아사히나의 해석은 충분히 무르익어 있었고, 그것은 이 CD에서도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조금 맥없이 시작하는 오프닝이 걸리기는 해도, 절제된 가운데 존재감이 싱싱한 팀파니와 금관, 주저함이나 흐트러짐 없이 자신있게 그어대는 스트링 등 1악장부터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어 독일 민속 춤곡인 렌틀러를 기반으로 한 2악장은 약간 빠르게 진행한 것이 독특했고, 3악장은 적당히 느린 속도와 푸근한 느낌 때문에 마치 자장가를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발터의 경우에는 Nicht schnell(빠르지 않게)이라는 악상 기호를 생각해 보면 템포가 지나치게 빨랐던 듯하다-.
4악장의 경우에는 템포 설정에 조금 의문이 갔다. 쾰른 대성당의 장엄한 주교 의식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만큼, 종래의 연주들은 이 부분을 브루크너의 느린 악장 풍으로 꽤 느리고 위엄있게 가져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사히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좀 빠르게 진행시켰는데, 장엄함 보다는 뭔가 장송 행진곡같은 느낌이었다.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는 4악장에 이은 마지막 5악장 연주는 1악장과 비슷한 선상에서 이루어 졌는데, 순 일본산 연주라는 핸디캡도 잊을 정도로 인상적인 호연이었다. 마지막의 금관 주도 클라이맥스는 찌르는 트럼펫 보다는 둥근 호른을 앞세워서 품위있게 다루어진 것도 상당히 개성적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목관의 존재감이 좀 약하다는 점이 지적받을 점이기는 했지만, 원산지에서도 기대하기 힘든 연주라는 점에서 그렇게 신경쓰이는 단점도 아니었다. 별다른 경쟁자가 없는 한, 슈만 3번의 레퍼런스로 확정!
ⓟ 2001 King Record Co., Ltd.나머지 한 장은 R.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슈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킹레코드. 역시 위 사진). 1983년 6월 20일에 오사카 심포니홀에서 실황으로 녹음된 음반이었는데, 80년대의 아사히나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게 해주는 음반이었다.
'차라투슈트라...' 는 이 작품을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가 나온 이래 '철학적' 이기 보다는 '우주적' 인 컨셉으로 연주하는 것이 경향으로 되었는데, 그런 점에서 주빈 메타와 로스앤젤레스 필의 연주가 그 동안의 내 레퍼런스였다.
아사히나의 경우에는 '철학' 쪽에 더 치중한 것 같은데, 그 덕분에 곡의 입체감은 좀 상쇄된 느낌이다. 유명한 도입부의 '자연의 주제' 는 박력과 장대함은 있되, 공간감이 부족했다. 좀 과하다 싶은 베이스 드럼 소리와 마지막의 거대한 투티 후에도 홀로 남겨지는 파이프 오르간의 약한 볼륨이 귀에 거슬렸는데, 녹음상의 문제인 듯 하다. (녹음 프로듀서들에게 이 곡은 비교적 작업하기 힘든 곡으로 소문나 있다.)
그 외에 후반부에서 큰 비중이 주어지는 바이올린 독주나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울리는 저음 종의 소리도 지나치게 작아서 그 맛이 싱거웠다. (하프는 아예 파묻혀 있었고) 일단 음향 면에서 이 연주는 마이너스 점수를 면치 못했는데, 차라리 90년대에 녹음이 됐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연주의 질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슈트라우스 자신이 초연 때 '감히 철학의 음악화를 시도했다' 면서 욕바가지를 먹자, '나는 단지 니체의 천재성을 기리기 위해 썼을 뿐' 이라고 뒤로 물러선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깊은 무언가를 역설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사히나 자신이 차라투슈트라의 여정에 동반자로 참가하고 있다는 망상까지 들 정도였는데, 특히 그 깊이는 '묘지의 노래(Das Grablied)' 의 황량함이나 마지막 대목인 '몽유병자의 노래(Das Nachtwandlerlied)' 의 신비스러움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휘저을 곳에서는 휘젓되, 생각이 깊어야 되는 곳에서는 마치 선불교에서 명상하듯이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과연 대가답다는 생각이었다.
이상의 두 음반 모두 무편집 실황이라는 점에서 오는 몇몇 기술적인 결함이나 실수가 종종 눈에 띄고, 좀 이해가 안 가는 대목도 있기는 했지만 그 값을 충분히 다 하고도 남는 물건들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음악계에 대한 부러움도 계속되었는데, 도쿄도 아니고 우리 나라의 부산 정도인 도시의 관현악단이 이 정도로 수준급 연주를 들려주는 것은 단순한 연륜이나 재력 가지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대목이다. 역시 이들의 근성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