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소스(Naxos)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본 작곡가 선집' 에 차근차근 소개되고 있는 작곡가들은 1886년생인 야마다 고사쿠부터 1953년생인 요시마츠 다카시까지 상당히 광범위한 인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인 혹은 한국계 작곡가의 작품이 담긴 CD가 윤이상과 얼 킴 각 한 장씩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저 프로젝트는 최소 60장의 CD가 발매될 예정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총 18종이 이미 발매중)
물론 개중에는 하시모토 구니히코나 마유즈미 도시로처럼 군국주의 혹은 극우파의 앞잡이로서 행세하며 몹쓸 짓을 많이 하고 다녀서 이뭐병같은 이들도 있지만, 일본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 꼽히는 카나이 키쿠코나 이번에 소개할 기시 고이치(貴志康一, 1909-1937)같이 호기심을 유발하는 몇몇 뉴페이스(???)들도 있다.
기시 고이치는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서 하모니움(풍금)을 배운 것을 시작으로 열 살때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신했다. 열다섯 살 때 일본 최초의 서양 관현악단인 다카라즈카 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요제프 라스카에게 음악 이론과 작곡을 배우면서 간단한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시의 주 관심사는 바이올린이었고,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방 각지의 관현악단과 실내악단에 참가해 연주하던 중 고베에 있던 롤렉스 지점장의 권유로 1927년에 스위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기시는 생애 총 세 번에 걸쳐서 유럽 유학을 했는데, 첫 번째인 1927~29년에는 주네브(제네바)와 베를린에서 칼 플레슈와 막스 로스탈 등의 대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년 간의 일시 귀국 뒤 1930~31년에 다시 베를린에서 두 번째 유학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동안 기시는 바이올린 외에도 여러 다른 예술 분야의 수업도 들었다고 한다. 파울 힌데미트에게 영화음악 이론을 배우기도 했고, 막스 라인하르트 연극 학교에서는 독일어와 연극 강의를 듣기도 했다.
기시는 1931년에 다시 귀국해서 힌데미트의 영화음악 이론과 라인하르트의 연극론을 주춧돌 삼아 '기시 학술 영화 연구소' 를 차려서 영화 제작에도 뛰어 들었고, 동시에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해 천연색(컬러) 영화인 '바다의 시' 등에 영화 음악을 붙였다. 그리고 자작의 가곡이나 편곡 작품을 출판하기도 하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독주회와 협연 무대도 여러 차례 가졌다.
1933년에 마지막 유럽 유학길에 오른 기시는 자신의 영화 연구소 제작 필름을 독일 최대 영화사였던 우파(UFA)에 매각하고, 우파에서 '거울' 과 '봄' 등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거울' 에서는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함)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곡과 지휘법을 배우면서 바이올린 협주곡과 독주곡, 가곡, 관현악 모음곡 '일본조곡' 등을 작곡했다.
기시가 베를린 필(Berliner Philharmoniker)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도 이 세 번째 유학 때였는데, 1934년 3월 29일에 우파 영화사 주최의 '일본의 밤' 이라는 특별 연주회에서 지휘를 맡은 뒤 베를린 필 측과 직접 객원 지휘 출연에 대한 끈질긴 교섭을 시작했다고 한다. 기시는 당시 지휘와 작곡 외에도 각종 악기들을 베를린 필 단원들로부터 직접 배우고 있었고, 베를린 필의 총연습 때도 자주 들이댔다고(???) 한다.
결국 기시는 그 해 11월 18일에 베를린 필의 '일요일 음악회' 에 출연했는데, 이 때의 프로그램은 지금 관점으로 보아도 상당히 도전적인 것이었다. 기시 자신도 1933년에 이미 베를린 필을 지휘했던 고노에 히데마로가 서양 레퍼토리 위주로 연주회를 열었던 것을 지인들에게 상기시키며, 자신은 자작곡을 많이 포함시킬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기시는 그 말을 실제로 실천했는데, 1부에서 글룩의 오페라 '알체스테' 서곡, 그리고 기시 자신의 작품인 교향곡 '부처의 생애' 와 여섯 곡의 가곡이 연주되었다. 2부에서는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과 역시 기시 자작곡인 '일본 스케치',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이 연주되었다.
자작곡과 서양 레퍼토리를 반반씩 섞어서 마련한 이 연주회는 독일 제국 방송국에 의해 전국 방송을 탔고, 곧 독일의 주요 언론에서 이를 특필하기 시작했다. 물론 악평이 대다수였지만, 가곡만은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기시가 지휘한 '일요일 음악회' 는 베를린 필이 아닌 독일-일본 협회가 주관하는 일종의 특별 연주회 시리즈였는데, 결국 기시가 정치계와 예술계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으로 집요하게 로비를 벌인 끝에 얻은 결과물이기도 했다. (안익태의 베를린 필 연주회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연줄 덕택으로 이 '일요일 음악회' 시리즈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과정과 결과물이 어쨌던, 기시는 일본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작품을 베를린 필의 연주로 독일 전국에 들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주회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1935년 3월에 독일 음반사인 텔레푼켄(Telefunken)에서 녹음까지 했다. 물론 오케스트라는 당연히 베를린 필이었고, 1500엔(=1500라이히스마르크(제국 마르크))의 사비를 털어서 제작한 것이었다.
기시는 이 녹음 세션을 3월 27일~4월 1일의 6일 동안 하기로 했었는데, 기시가 갑작스럽게 귀국해야 한다는 이유로 단 이틀 만에 녹음을 끝내야 했다. 기시는 27~28일 이틀 동안 텔레푼켄의 녹음 전용 홀이었던 베를린의 징아카데미(Singakademie)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빡빡한 분량인 24면의 녹음을 했고, 29일에는 비행기 편으로 나폴리로 향한 뒤 거기서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기시가 베를린 필과 녹음한 자작곡들은 '일본 스케치' 전곡과 '일본조곡' 중 두 곡-도톤보리(道頓堀)와 꽃구경(花見)-, 가곡인 '게이샤(藝者)', '후지산(富士山)', '고우타(小唄)', '제비(つばくら)', '꽃파는 아가씨(花売娘)', '행각(行脚)', '갈매기(かもめ)', '빨간 비녀(赤いかんざし)', '창공(天の原)', '가마꾼(かごかき)', '인력거(力車)', '八重桜(←번역 불능...OTL)', 그리고 유명한 민요인 '사쿠라 사쿠라' 의 자작 편곡이었다.
관현악 작품 두 곡을 제외한 가곡과 민요는 '일요일 음악회' 에서도 협연했던 소프라노 마리아 바스카(Maria Basca)와 녹음했는데, 바스카는 이후 기시가 복막염으로 쓰러져 투병 중일때 일본으로 건너와 문병을 오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스케치' 의 첫 곡인 '시장' 과 '일본조곡' 의 '도톤보리' 는 독일에서도 음반이 발매되었다.
이들 녹음의 원판은 4월에 기시의 자택으로 발송되었는데, 지금도 기시 기념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스케치' 의 마지막 곡인 '마츠리(祭)' 는 두 면 중 한 면이 분실된 상태임) 그리고 '일본 스케치' 와 '일본조곡' 만을 담은 복각판 CD가 1991년에 일본 빅터(Victor)에서 발매되기도 했다. (아래 짤방 참조)
ⓟ 1991 Victor Entertainment Inc.기시는 귀국 후 자작의 오페레타와 발레를 비롯한 여러 곡들을 일본 초연했고, 베토벤 교향곡 9번과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 발췌 등의 서양 레퍼토리도 지휘/방송했다. 그리고 영화 사업에도 다시 뛰어들어 '국제영화주식회사' 의 설립을 추진하고 베를린 필의 일본 공연도 기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시는 1936년 6월에 복막염 발병으로 인해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세 차례에 걸친 수술과 뒤이은 가족들의 급성 폐렴으로 인한 돌연사 등으로 몸과 마음 모두가 심한 압박을 받는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퇴원 후 요양 생활을 하면서 다시금 재기를 노렸지만, 1937년 11월 17일에 결국 심장마비로 겨우 28년 동안의 짧은 삶을 마쳐야 했다.
일본에서 기시는 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급의 천재로 존경받고 있는데, 음악 외에도 영화와 연극에까지 손을 뻗치는가 하면, 위의 베를린 필과의 협연과 녹음을 약관 20대의 나이로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일본은 자국 지휘자 세 명이 베를린 필과 녹음했다는 기록을 자랑하고 있다. 텔레푼켄에 녹음한 기시와 도이치 그라모폰에 녹음한 고노에 히데마로, 그리고 오자와 세이지가 그들이다. 거기에 켄트 나가노까지 합치면 네 명)
천재적인 재능과 돈키호테 급의 황당한 도전, 그리고 일본에 대해 막연한 신비감을 가지고 있던 서양인들의 호기심이 복합적으로 빚어낸 결과물이 기시와 베를린 필의 레코드로 남아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할 만큼의 자신있는 작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낙소스에서 발매될 기시 작품의 음반도 개인적으로는 꽤 기대되지만, 기시와 베를린 필의 녹음을 구해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안익태의 '에텐라쿠' 와 '만주국' 은 왜 녹음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괜한 심술이려나?
*어느 일본인 애호가의 기시 관련 페이지. 약력과 작품 목록, 연주회 기록, 영화 관련 자료, 디스코그래피, 일본에서 활동하다 처형된 독일계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와 기시가 자리를 같이 한 음악회의 에피소드 등이 상당히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http://www.h4.dion.ne.jp/~kishi_k/kishipag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