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단행본의 수명은 그다지 길지가 않다. 심지어 비인기 작품들 같은 경우에는 손익분기점의 문제로 인해 일부러 늦게 출판하거나, 극히 적은 수량만 출판시켜 조기절판의 길을 걷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1990년대에 나온 단행본들도 소위 '인기작' 을 제외하면 헌책방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엄청난 가치의 레어 아이템이 있다.
1991년 12월 5일에 도서출판 대원(현 대원씨아이)에서 '소년챔프' 를 창간하면서 소년만화 시장에 뛰어들었는데, 라이벌 출판사였던 서울문화사의 '아이큐점프' 와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창간 후 대원에서는 신인 연재작가를 물색하기 위해 이듬해 1월 8일에 '신인만화가상' 을 제정하고 작품 공모를 시작했다. 3월 23일에 1/4분기 신인만화가상 입상작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고, 1993년 7월 20일에는 '챔프 만화대상' 으로 명칭이 바뀌어 5회째 입상작들이 계속 발표되었다.

ⓒ 1994 도서출판 대원 (현 대원씨아이)대원은 1994년 12월 5일에 발표된 제 8회 수상작까지의 작품들 중에서 주요 입상작들을 간추려 '챔프 만화대상 수상작품집' 이라는 두 권의 단행본을 발표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994년 12월에 발매된 2권이다. 수록된 작품은;
Hunter (고병규. 6회 가작)
블루하트 (김동현. 6회 공동당선작)
겨울비 (김곡. 6회 공동당선작)
치씨부임기 (형민우. 6회 가작)
행복시작 예감 (황철웅. 7회 가작)
수호천사 마니또 (서영웅. 7회 가작)
그해 겨울에는 (김태환. 6회 특별상)
수호전 (박민서. 8회 가작)
MAN TO MAN (김병진. 8회 공동당선작)
지금도 익숙한 이름이 종종 들어온다.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그 '익숙한 이름' 의 작가들이 공동당선작이나 준당선작 같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가작 수상에 그쳤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고 중요한 작품이라고 치고 싶은 것이 고병규, 형민우, 서영웅, 박민서 네 작가의 데뷰작 들인데, 해당 작가들의 이후 주요 작품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스타일이 엿보이는 것에서 부터 '저 작가가 저랬나?' 라고 할 정도로 색다른 것까지 상당한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쿨한 바보 스타일의 형사가 주인공인 고병규 화백의 'Hunter' 는 90년대 SF 개그 패러디 만화였던 '먹통-X' 의 센스를 미리 예견하는 단편인데, '웃긴' 걸로 따지면 네 작품 중 최고였다. 특히나 허무개그 센스의 엔딩이 대단하다.
고병규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 '조삼모사' 같은 극히 한정된 두 컷짜리 개그물에서 보여주는 간결한 촌철살인급 유머는 아니더라도, 미국 범죄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상황을 비틀어 해석하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형민우 화백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작품이 아마 '프리스트' 일 것이다. 그 외에 '태왕북벌기' 를 꼽는 사람도 있을 거고.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풍은 커다란 스케일의 역사물이나 사이코 스릴러물 같은 것이 아닌, 소위 뭉뚱그려 말하는 '명랑만화' 계열이었다.
'치씨부임기' 는 이후 형민우의 첫 번째 연재작이 된 '열혈 유도왕전' 보다 더 전형적인 명랑만화 스타일인데, 폭풍간지와 비뚤어진 정의감으로 무장한 학교 수위 '치사안' 이 오히려 선도부원 학생 두 명에게 캐관광(?)당하는 내용이다.

'굿모닝 티처' 로 상당한 인기를 모은 바 있는 서영웅 화백은 가벼운 대학 새내기 연애물인 '수호천사 마니또' 를 출품했는데, 이 작품의 제목에서 컨셉을 따서 연재 데뷰작인 '못말리는 수호천사' 를 그리기도 했다.
그림체 자체는 '수호천사' 나 '굿모닝 티처' 에 비하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서영웅 특유의 개성은 살아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요 무대가 되는 신입생 OT 풍경의 묘사도 흥미있는데, 작가의 출신 대학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도 들어 있다.

'웨스턴 샷건' 을 장기 연재하고 있는 박민서 화백은 재벌집 아들내미가 자신의 보디가드로 고용된 미녀 수호령과 겪는 일상을 그린 '수호전' 으로 데뷰했는데, 정작 기대했던 격투 장면에서는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여서 아쉬웠다. 아마 '단편' 이라는 제한된 지면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아예 따로 중편 정도를 그려 줬었다면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위의 네 작품에 비해, 좀 더 격이 높은 '당선작' 딱지를 단 작품들은 오히려 실망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족 화합을 주제로 하는 공익광고 스토리에 쓸 법한 도식의 작품, 갈등 요소가 거의 없이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상투적 연애물, 지면 부족으로 이야기를 갑자기 끝낸 듯한 학원물 등인데, 당시 심사위원들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심사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네 작가의 단편 모두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비대창대하리라' 는 문구가 실감난다. 물론 어느 작가는 인기작을 꾸준히 내놓고 있고 어느 작가는 슬럼프에 빠졌다는 평가도 있고 하기는 하지만, 한국 만화사에서 나름대로의 발자국을 남겼고, 또 남기고 있는 작가들인 만큼 그 근원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