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미 유지(野見祐二, 1958-)는 예전에 극장판 'AIR' 관련 글로 몇 번 언급한 바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테마로 잡아서 좀 진득하게 다루고자 한다.
노미는 1958년에 도쿄에서 태어났고, 10대 시절부터 음악에 흥미를 보여 학교 경음악부에 키보디스트로 참가해 락과 재즈 등의 파퓰러 넘버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음대나 음악원 등에서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는 않았고, 주오 대학교 이공학부에 진학했으나 이것도 얼마 안가 자퇴했다고 한다.
음악 이론 등은 주로 독학으로 익혔다고 하는데, 1983년부터는 현대미술가들의 전위적인 퍼포먼스에 참가해 음악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때 신디사이저를 사용해 원맨 밴드 형식의 다중 녹음을 시도할 정도로 실전 경험을 쌓았는데, 우연히 노미가 참가한 퍼포먼스를 관람하던 사카모토 류이치의 눈에 들어 사실상 제자 겸 공동 작업자가 되었다.
1986년에 첫 번째 공식 앨범인 '오샤레-TV' 를 사카모토의 협력으로 출반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사카모토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보조 작곡가 겸 편곡자로 이름을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얼마 전 정식 개봉해서 화제를 모은 '오네아미스의 날개' 를 비롯해 '새끼 고양이 이야기', '마지막 황제' 등의 음악 스탭진에서도 노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노미가 독자적인 음악 감독이나 작곡가 직책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쯤이었는데, 1994년에 뮤지컬 '판타지아' 의 음악 감독을 맡은 것이 공식적으로 최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계 감독 양성 계획과 맞물려 제작된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 의 음악 감독을 맡았는데, 이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97~99년에는 고베 루미나리에의 음악을 맡았고, 2001년에는 미타카 지브리 미술관 전용 상영작들인 '고로의 대산책' 과 '고래 새' 의 음악을 작곡해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했다. 2002년에는 이어 모리타 히로유키 감독의 '고양이의 보은' 음악 감독을 맡았고, NHK 텔레비전 창사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남극 대기행' 의 음악을 NHK 교향악단과 녹음해 제작했다.
한국에서 노미의 음악은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계통의 OST로 알려져 있는데, 물론 나도 노미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이 '고양이의 보은' 때였다. 무타가 개박하젤리통에 빠져서 실려가는 장면에서 무려 말러의 교향곡 1번 3악장이 인용되기도 했는데, 노미의 이력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지나서였기 때문에 독학으로 성장한 작곡가인 줄은 몰랐었다.
ⓟ 2002 Tokuma Japan Communications / 2003 Ponycanyon Korea Inc.그 때 구입한 라이센스 OST 앨범에는 츠지 아야노가 부른 주제가 '바람이 되어' 가 일본어 노래라는 이유로 빠진 채 출반되었는데, 얼마 후 일본문화 개방이 발표되면서 기존의 주제가 미수록 앨범들이 다시 주제가 포함 형태로 재출반되기 시작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유감스럽게도 '고양이의 보은' 앨범에는 그러한 수정판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라이센스반 해설지에는 '주제가가 생략된 대신 체코 필하모닉 실내 관현악단이 연주한 보너스 트랙 다섯 곡을 실었다' 고 되어 있었는데, 인터넷을 뒤져 보니 주제가 생략에 대한 답례는 아니었다. (일본 원판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실려 있으니)
보너스 트랙이라고 되어 있는 다섯 곡은 사실 정규 관현악용 모음곡(Suite)인데, 히사이시 조 처럼 OST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지 앨범 형식으로 만든 곡들을 추려서 편곡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휘자는 앨범에 나와있지 않지만, 지브리 앨범을 비롯한 일본 애니메이션 OST의 단골인 마리오 클레멘스(Mario Klemens)였고.
*각 악장의 표제:
1. 바론 (バロン)
2. 고양이 왕 (猫王)
3. 하루의 부기우기 (ハルのブギ. 피아노 협연: 이토 미유키)
4. 목가 (パストラーレ - 牧歌)
5. 하루의 추억 (ハルのおもいで)
너무 자잘하게 토막낸 OST 보다는 이 모음곡이 더 인상에 남은 앨범이었는데, 상당히 풍성하면서도 짜임새있게 관현악 편곡된 솜씨가 돋보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4년에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떡밥' 으로 나왔던 이슈들 중 하나가 'AIR' 의 애니메이션화였는데, 관록을 자랑하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으로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만든 극장판과, 그 당시로는 하청 작업 위주의 마이너 업계였던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총감독으로는 처음 나온 이시하라 타츠야의 진두지휘로 만든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판의 경합이 화제가 되었다.
결과는 극장판보다 방영은 늦었지만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퀄리티로 단숨에 화제가 된 교토의 승리였고, 토에이의 극장판은 미스즈의 예기치 않은 비속어 구사라던가 탑블레이드 수준으로 묘사된 류야의 팽이, 타이밍이 의심스러운 개그 등으로 비판받으면서 흥행에 악재로 작용했다. 교토와 토에이의 경합은 이후에도 '카논' 으로 화제가 되었고, 최근에는 '클라나드' 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어쨌든 극장판이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건 흥행과 상관없이 DVD로 선을 보였는데, 토에이는 흥행 실패를 미디어믹스 마케팅으로 만회하려고 했는지 한정판 패키지인 '컬렉터즈 에디션' 과 '스페셜 에디션' 을 통상판과 함께 발매했다. 하지만 이러한 한정판들마저 발매 후 1년이 넘도록 재고 품목으로 쌓여 있었다고 하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음)
그 때 극장판에서 예상 외로 노미 유지가 관여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애니메이션 본편이 아니라 '스페셜 에디션' 의 특전에서 편곡자로 참가했다는 것이었다. '스페셜 에디션' 은 본편 DVD와 드라마 CD, 그리고 예상을 깨는 '교향곡 CD' 세 가지가 커플링된 세트였는데, 그 중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마리오 클레멘스의 지휘로 프라하에서 녹음한(!!!) 교향곡을 편곡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애니메이션/게임 OST의 교향곡 혹은 교향조곡화 사례는 이미 몇 년 전에 시리즈로 글을 썼을 정도로 일찌감치 접해 왔지만, 이렇게 한정판 기획으로 낼 정도면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가격이 떨어지길 계속 기다렸다.
결국 구입을 결심한 것이 전역 후 한 달 반 남짓 되었던 작년 12월 중순이었고, 구매대행 업체에 문의한 결과 '아직도 재고가 많이 있으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는 답변을 들었다. 일본어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지른 첫 일본판 DVD였는데, 따져 보면 '40분짜리 특전 CD를 듣기 위해 99500원을 투자하는 캐뻘짓' 을 한 셈이었다.
ⓟ 2005 Frontier Works교향곡으로 떡하니 내건 곡답게 전곡이 고전적인 4악장제로 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고전 형식까지 비교적 엄격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1악장은 서주 붙은 소나타 형식-심지어 주제 제시부가 반복되는 것까지 지키고 있음-이고, 2악장은 론도 형식의 안단테 악장, 3악장은 미뉴에트 다 카포 (혹은 브루크너식 스케르초 다 카포. A-B-A 중 A가 B 다음에 거의 변함없이 반복되는 고전 형식임) 형식에 악상은 말러나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케 하는 좀 그로테스크한 스케르초, 4악장은 변형된 소나타 형식에 1악장의 첫 주제를 섞어 유기성을 얻고자 한 순환 형식을 쓰고 있었다.
*각 악장의 표제: (주제로 사용된 OST 원곡들에서 따옴)
1악장: 신화로 유혹(神話への誘い)-둘이서(ふたり)
2악장: 새의 시(鳥の詩)
3악장: 검은 수레바퀴는 말한다(玄ノ轂ハ語ル) -> 좀 애매함. 제대로 된 번역 필요
4악장: 만약 꿈이 이루어졌다면(If Dreams Came True)
형식 뿐 아니라 원재료의 가공 또한 놀라웠는데, 주제로 쓰인 원곡들의 성격을 뒤집은 것이었다. 가령 비교적 느린 템포에 감상적인 느낌의 '검은 수레바퀴는 말한다' 와 'If Dreams Came True' 는 각각 3악장 스케르초와 4악장의 제 1주제로 사용되었고, 비교적 리드미컬한 느낌이 전반부를 차지하는 '새의 시' 는 2악장 안단테의 주제로 사용되었다.
노미는 겸손하게도 자신이 편곡을 담당했다고 쓰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면 '편곡' 이 아닌 '작곡' 이라고 봐야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원곡들의 색채를 180도 바꿔서 전통 교향곡으로 승화시킨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노미는 편곡을 하면서 원작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나 플롯 등과 관계없이 순음악적인 마인드를 유지한 모양인데, 4악장 종결부도 통상적인 '해피 엔딩' 으로 가져가고 있다.)
물론 이 특이한 기획의 교향곡을 서양 명작 교향곡들의 반열에 놓는 것은 무리겠지만, 비교적 생소한 노미 유지라는 작곡가의 또다른 역량을 알 수 있는 물건이라는 점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교토와 토에이의 3라운드 (혹은 2라운드. '카논' 의 경우에는 제작 연도의 격차가 너무 크므로) 격인 '클라나드' 도 일단 토에이가 먼저 치고 나가면서 시작됐는데, 'AIR' 에서 쓴잔을 들이켰던 데자키 오사무가 과연 어떻게 승부를 걸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흥행 여부와 상관 없이 이번에도 스페셜 에디션으로 노미가 참가해 교향곡 2탄을 만든다면 또 한 번 목돈을 들일 용의도 충분히 있고. (대충 듣자 하니 'AIR' 보다는 그래도 실적이 낫다고 한다.)
노미 유지 홈페이지 (일본어/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