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에서 특히 '윤이상 탄생 90주년' 이라는 것도 있어서 생일부터 타계한 날까지를 잡아 윤이상 기념 음악축제를 상당히 거창하게 열었다. 하지만 같은 탄생 90주년 작곡가인 김순남의 경우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내가 알기로는) 거의 없었으며,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김순남 가곡집의 CD화도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작곡가 외에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 아티스트가 있는데, 그 아티스트가 앨범을 가장 많이 낸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DG)에서는 그 사실을 까먹고 있는지 어쨌는지 아직 기념 앨범을 낸다거나 하는 움직임이 없는 실정이고.
그 '아티스트' 는 20세기에 '남성 하피스트' 라는 아주 보기 드문 영역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했던 에스파냐 출신의 니카노르 사발레타(Nicanor Zabaleta)다. 예전에 라이네케 하프 협주곡을 레어 애청곡선에서 다뤘을 때 잠깐 언급된 인물이었는데, 1907년 1월 7일에 바스크 지방의 산 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으니 뭔가 기념 음반 같은게 나올 껀덕지가 있는 것이다.
사발레타의 아버지는 본래 직업이 유리 세공인이었지만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는데, 아들이 여덟 살이던 해에 골동품 가게에서 18세기 구식 하프 한 대를 운좋게 입수해 선물로 주면서부터 평생에 걸친 하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우선 고향에서 기초적인 음악 교육과 연주법을 배운 다음 마드리드와 파리로 옮겨 다니면서 배웠는데, 그 당시 에스파냐에서 남자로 하프를 다루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사발레타의 에스파냐 시절 스승 두 사람이 모두 여성이었고, 파리에서도 그 당시 하프계의 지존이었던 마르셀 투르니에가 유일한 남자 스승이었음)
파리에서 배웠을 때부터 사발레타가 하프 솔리스트로 활동할 뜻을 굳힌 것 같은데, 1926년에 그 곳에서 공식 데뷰하고부터 줄곧 오케스트라의 단원 등으로 종속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934년에는 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는데, 이 때 큰 성공을 거두면서 솔리스트로 거의 독보적인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미국 여행 뒤로 귀국하기까지 거의 18년 동안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면서 순회 공연을 하는 식으로 지내야 했는데, 에스파냐 내전과 뒤이은 2차대전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사발레타는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나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월터 피스턴 같은 아메리카 대륙 작곡가들과 다리우스 미요, 에른스트 크셰네크 등의 망명 작곡가들과 만나 친교를 나누었고, 그들에게 여러 곡을 위촉해 하프 레퍼토리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952년에는 고향인 산 세바스티안으로 돌아왔고, 그 곳에 거주하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리사이틀이나 협연 무대, 녹음, 교육 등의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사발레타는 평생 동안 3000번도 넘는 연주회를 열어 하피스트로서 최다 연주 횟수를 기록했는데, 한국에는 1962년에 열린 서울 국제음악제 때 처음 와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공연장. 화재로 소실됨)에서 독주회를 가졌다(5월 3일). 이어 1978년에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음악제 때 내한해 소강당에서 독주회를 한 차례 더 가지기도 했다(5월 19일).
70줄을 넘긴 뒤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발레타였지만, 1990년대부터는 지병이었던 간암이 악화되면서 건강 상태가 급속도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1992년 6월 16일 마드리드에서 개최한 리사이틀 무대가 마지막 연주가 되었고, 아내의 고향이기도 한 푸에르토 리코로 건너가 요양하다가 이듬해 3월 31일에 타계했다.
사발레타의 레퍼토리는 고전에서 초기 낭만에 이르는 18~19세기 작품 위주였으나, 위에 쓴 대로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위촉한 현대 작품과 바로크, 르네상스 등 고전 이전 시대의 작품도 자주 다루었다. 넓은 레퍼토리 외에도 '자신만의 악기' 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1950년대에 독일 하프 장인인 요제프 오버마이어에게 기존의 7개 페달 악기 대신 하나를 더 추가한 8개 페달의 하프를 특별 주문한 뒤로 저 악기만을 썼다고 한다.
사발레타가 DG에 여러 녹음을 남긴 시기가 오버마이어의 하프를 쓰기 시작했던 때와 비슷했는데, 첫 세션은 1957년 1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다. 페렌츠 프리차이(Ferenc Fricsay)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협연으로 헨델의 하프 협주곡과 드뷔시의 하프와 현을 위한 춤곡, 라벨의 서주와 알레그로 세 작품을 녹음했는데, 다만 모노 녹음이었고 CD 복각도 되지 않은 상태다.
지금도 CD로 나오고 있는 녹음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제작한 스테레오 녹음들인데, 협주곡으로는 1959년 10월에 녹음한 부아엘디외의 하프 협주곡과 로드리고의 협주 세레나데 두 곡이 첫 스테레오 녹음이었다. 관현악은 마찬가지로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이었지만, 지휘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른스트 메르첸도르퍼(Ernst Märzendorfer)로 바뀌었다.

ⓟ 1960 Polydor International GmbH사발레타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고전~초기 낭만 시대의 하프 곡들은 현대 하프로 연주하기가 오히려 힘든 편에 속하는데, 그 당시의 하프와 비교해 보면 현의 장력이 훨씬 강해지고 무게가 무거워졌기 때문에 빠른 패시지를 소화해내기 쉽지 않다는 애로사항이 꽃핀다는 것이다. 부아엘디외의 협주곡도 마찬가지 케이스인데, 물론 그 기교도 기교지만 C장조의 곡이 C단조로 끝난다는 점도 특이한 곡이다.
(*이는 당시 하프의 구조 때문이었는데, 페달을 다 밟고 연주하는 것이 떼고 연주하는 것보다 소리가 더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아엘디외 시절의 하프는 페달을 다 밟았을 때 연주 가능한 조성이 E플랫장조와 C단조였고, 그것 때문에 고전적인 법칙을 포기하면서까지 전조해서 끝낸 것으로 추측된다.)
로드리고 작품은 사발레타 자신이 위촉해 초연한 곡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도 '모범적 연주' 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곡 자체도 20세기 하프 협주곡 레퍼토리로 애호받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 남아메리카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발레타를 의식해서였는지 콜롬비아나 아르헨티나 등의 민속 음악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는데, 헤미올라나 당김음 사용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후속 협주곡 녹음은 DG에서 협주곡이나 오페라, 가곡 등의 녹음 때 많이 사용하던 베를린의 우파(UFA) 영화사 음향 스튜디오에서 1962년 10월에 진행됐는데, 모차르트의 플룻과 하프를 위한 협주곡과 라이네케의 하프 협주곡이 녹음되었다. 예전처럼 메르첸도르퍼가 지휘자로 기용되었고, 관현악단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 1963 Polydor International GmbH모차르트 곡에서는 칼하인츠 쵤러(Karlheinz Zoeller)가 공동 협연자로 나왔는데, 쵤러는 베를린 필 수석 플루티스트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용되었다. 카라얀의 바흐 관현악 모음곡 2번이나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연주자인데, 음반은 없지만 윤이상의 플룻 협주곡을 초연한 인물이기도 했고. 라이네케의 곡은 예전에도 썼듯이 거의 묻혀있던 작품이었지만 사발레타에 의해 빛을 본 작품이었는데, CD화는 상당히 늦은 편인 2001년에나 되었다.
1965년과 1966년에는 비교적 소편성의 협주곡 작품들을 녹음했는데, 편성에 맞게 프랑스의 지휘자 폴 퀴엔츠(Paul Kuentz)가 이끄는 폴 퀴엔츠 실내 관현악단이 협연했다. (퀴엔츠는 독일식 철자법 때문에 '파울 쿠엔츠' 라고 흔히들 읽는 인물이지만, 프랑스 토박이므로 폴 퀴엔츠가 맞다고 봄) 녹음 장소는 파리의 노트르담 뒤 리방 성당이었고, 프리차이와 녹음한 작품들의 스테레오 재녹음과 새로운 레퍼토리의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작업이었다.

ⓟ 1965 Polydor International GmbH

ⓟ 1967 Polydor International GmbH1965년의 세션에서는 거의 '듣보잡' 이었던 아이히너와 바겐자일의 하프 협주곡에 디터스도르프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칼 헤르만 필나이가 편곡한 것과 모차르트의 글라스 하모니카 5중주곡을 하프로 바꾸어 연주한 곡이 녹음되었다. 이듬해에는 프리차이와 녹음했던 헨델, 드뷔시와 라벨의 작품과 (베토벤의 스승이었던) 알브레히츠베르거의 하프 협주곡이 녹음되었는데, 모차르트와 라벨의 작품은 실내악 편성이었기 때문에 관현악단 단원들과 지휘자 없이 녹음했다. (라벨의 모노 녹음은 프리차이가 지휘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음)
하지만 저 두 세션 중 CD로 '제대로' 재발매된 것은 1966년의 세션 뿐이고, 그나마 지금은 공식적으로 폐반된 상태다. 1965년 녹음은 바겐자일과 디터스도르프 두 곡만이 이런저런 컴필레이션에 끼워져 CD로 발매되었고, 아이히너와 모차르트 곡은 아직도 소식이 없다.
네 번째 협주곡 녹음 세션은 1969년 10월에 있었는데, 이 때는 파리의 국립 방송 스튜디오에서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 지휘의 프랑스 국립방송 관현악단(현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과 생상의 연주회용 소품, 타유페르의 소협주곡과 히나스테라의 하프 협주곡을 녹음했다.

ⓟ 1970 Polydor International GmbH하지만 이 역시 CD로 제대로 재발매가 안되고 있는데, 생상과 타유페르는 나와 있지만 정작 사발레타가 위촉하고 초연한 히나스테라의 협주곡은 아직도 CD화되지 않고 있다. 생상과 타유페르의 작품은 각각 프랑스의 보수와 혁신 작곡가들이 남긴 하프 협주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곡이고, 히나스테라의 곡은 하프 특유의 아르페지오나 비스빌리안도 같은 주법을 효과적으로 쓰면서 뛰어난 리듬 감각과 민첩한 페달링까지 요구하는 난곡으로 손꼽힌다.
1974년에는 DG가 아닌 EMI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협주곡 녹음을 할 기회를 얻었는데, 로드리고가 사발레타를 위해 특별히 편곡한 '아란후에스 협주곡' 의 하프판과 패리쉬-알바스의 하프 협주곡 두 곡이었다. 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Rafael Frühbeck de Burgos)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국립 관현악단과 녹음했는데, 이 역시 CD로는 기껏해야 패리쉬-알바스의 협주곡만이-그것도 1악장이 제외된 채로-'하프 앙코르' 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들어갔을 뿐이다.

ⓟ 1974 EMI Records Ltd.1975년 5월에 칼 뵘(Karl Böhm) 지휘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의 플룻과 하프 협주곡을 재녹음하면서 DG에 복귀했는데, 이 때 플룻 솔로도 빈 필의 수석 플루티스트였던 볼프강 슐츠가 맡았다. 하지만 이 때 세션은 뵘의 모차르트 관악 협주곡 전곡 녹음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곡은 녹음하지 않았다. 이 녹음은 뵘의 명성과 더불어 지금도 CD로 줄기차게 나오고 있으므로 구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고. (그런 고로 짤방 생략)
사발레타와 DG의 마지막 협주곡 녹음 세션은 3년 반 뒤인 1978년 12월에 런던 헨리 우드 리허설홀에서 진행됐는데, 바흐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편곡한 클라비어 협주곡과 헨델의 오르간 협주곡을 사발레타가 하프용으로 편곡한 것들이 선곡되었다. 관현악은 가르시아 나바로(García Navarro)가 지휘하는 영국 실내 관현악단이 맡았는데, 바로크 작품들인 만큼 하프시코드 콘티누오를 포함시켜 연주하고 있다.

ⓟ 1979 Polydor International GmbH이렇게 여덟 번의 협주곡 세션은 얼핏 보기에 상당히 적어 보이지만, 그 당시 하프 협주 작품의 위치나 대접을 생각해 보면 결코 적지 않다. 더군다나 여기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DG와 아르히프 등에서 남긴 하프 독주곡 앨범들까지 합하면, 사발레타가 왜 20세기 하프 음악계의 거장으로 불리는지 어렵잖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역으로 남아 있는 사발레타의 음반은 상당히 적은 편이고, 가장 많은 녹음을 남긴 DG에도 겨우 여섯 종류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컴필레이션을 빼면 협주곡 앨범 두 장 뿐임) 미발표 녹음들을 여럿 끼워넣고 있는 오리지널 마스터즈 등으로 전집이 나올 법한데, 아직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걸 보면 음반 시장 불황 때문인지 어쩐지.
*사발레타 협주곡 CD 시기별 총정리 (세션별로 완전히 갖춰진 것만)
부아엘디외 하프 협주곡: DG 463 084-2 (갤러리아 시리즈)
로드리고 협주 세레나데: DG 463 648-2 (오리지널스 시리즈)
모차르트 플룻과 하프를 위한 협주곡(베를린 필): DG 463 648-2
라이네케 하프 협주곡: DG 463 648-2
헨델 하프 협주곡 작품 4-6: DG 439 693-2 (프랑스 폴리그램 더블 시리즈. 폐반됐으나 라이센스 재고는 종종 발견됨)
알브레히츠베르거 하프 협주곡: DG 439 693-2
라벨 서주와 알레그로: DG 439 693-2
드뷔시 하프와 현을 위한 춤곡: DG 439 693-2
바흐/헨델 하프 협주곡 (사발레타 편곡): DG 469 544-2 (갤러리아 시리즈. 본사에서는 최근 폐반되었으나 신품 재고를 종종 찾을 수 있음)
**그나마 1965년과 1969년 세션으로 만들어진 LP는 현재 소장 중이므로, 여비와 시간이 될 때 복각을 맡길 예정이다. 그리고 EMI반은 현재 수소문 중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