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월드를 비롯한 동인 행사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무슨무슨 온리전' 같은 소규모 행사에 관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는데, 다만 그 온리전의 테마들이 대부분 나와 상관없거나 관심이 없는 주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거운 엉덩이를 들 겨를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코믹월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소위 '대안행사' 의 기획이나 준비와 함께 좀 광범위한 개념의 온리전이 열린다는 포스팅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이름하여 '
백합제'. 물론 하드한 '레즈' 개념은 아닌 듯 했고-만약 그랬다면 공공시설인 도봉구민회관 회의실을 대관할 수 있었을까-, 행사 제목 그대로 '여캐 사이의 순수한 우정(이라고는 해도 원작들에서, 혹은 작가들의 해석에서 흠좀무 수위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음)' 이 테마인 듯 했다.
아무튼 네이뷁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에도 올라갈 만큼 화두가 된 듯 했는데, 그래서 그 전날까지 진행된 KTX 알바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찾아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지갑에 2만원이라는 돈이 남아 있었는데, 그나마 딱 절반만 쓰자고 작정한 터였고 소규모 행사였으니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도봉구민회관은 4호선 쌍문역에서 좀 걸어야 나오는 곳이었는데, 서울 토박이지만 서울 곳곳을 구석구석 다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사전에 교통편이나 약도 등을 몇 번씩 훑어보면서 지리를 익혔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헤맬 일은 없었고. 다만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잡상인인 'CD 판매상' 이 크게 틀어대던 노래 때문에 기분이 꽤 언짢아지는 촌극은 있었다.
구민회관에 도착하자마자 백합제에 관련된 표식을 이리저리 찾아봤는데, 현수막은 물론 기대하지 않았지만 땅바닥이나 벽에 흔히 붙이는 화살표 표식 같은 것도 일체 없었다. 그나마 회의실은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도착했기 때문에 이미 입장료 대신 팔던 카탈로그는 다 떨어진 상태였고, 웬만한 부스들의 상품들도 완매 아니면 몇 권 안남은 상황이었다. 가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정작 집을 나설 때까지 '이거 정말 가도 될까?' 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꾸물대던 우유부단함이 자초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지름신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패러디 위주의 회지들이 많았는데, 마리미테와 함께 쌍벽을 이루던 동방 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게임을 거의 안하는 나로서는 일단 중요 공략 대상에서 제외시키려고 했다. 다만 원작을 몰라도 보기에 지장없는 회지의 경우에는 구입하기로 했고. 하지만 비교적 익숙한 마리미테 같은 경우에도 회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 '구경만 하고 오자' 는 안이한 마인드였으니.
하지만 중요 대상에서 제외시킨 동방 시리즈의 회지부터가 지름신 강림의 시작이었다. '자의식과잉' 에서 출품한 물건이었는데,
판미 화백의 'Cross-Border(3500\)' 였다. 의상 때문에 흔히 '중국이' 라고 불리는 홍메이린x원작보다 좀 더 어려진 사쿠야를 메인으로 설정한 회지였는데, 사쿠야가 남자아이처럼 보인게 좀 에러이긴 해도-실제로 몇몇 팬들은 좀 보이쉬한 외모 때문인지 '사쿠야군' 이라고도 부른다고 함-어쨌든 무리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스토리 때문에 지름신 소환.
이어 웹에서 볼 때는 '그림체가 좀 이상하다' 고 생각해서 보류하고 있던 마리미테 회지가 두 번째로 걸렸다. 부스 'DOUBLE L' 에서
엘버 화백이 출품한 '장미의 기사(Le chevalier à la Rose. 4000\)' 였는데, 회지 제목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동명 오페라 내용을 떠올리게 했다. 일단 속는셈 치고 한 번 훑어 봤는데, 예상 외로 재미있고 그림체도 별로 걸리는게 없어서 가격 압뷁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지름신 소환. 작가가 왠지 홍장미 안티 혹은 츤데레인 듯 했는데, 아무튼 유미랑 사치코 지못미 ▶◀.
회의실 끄트머리에 마련된 조그마한 무대와 단상에서는 가족오락관의 스피드 퀴즈를 모방한 백합 지식 게임이나 OX 퀴즈 등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차마 참가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일단 부스들을 몇 번이나 돌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걸린 것이
다나민 화백의 부스 'Endless Life─★' 에서 내놓은 창작 회지 'Message(2000\)' 였다.
이번 회지가 첫 회지이자 개인지이며 백합지라고 되어 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캐릭터들이 '술먹고 찌질한 짓(원문 표현 그대로임)' 하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이야기를 단축시켰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도 스토리상으로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는데, 현실적(!)이고 소박한 설정의 여고생 캐릭터들이 나름대로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마지막으로 지름신 소환.
결산해 보니 총 지출액이 9500원 나왔다. 그나마 늦게 간 덕에 카탈로그가 떨어져 무료입장한 것 때문에 1000원을 번 셈이었지만, 나름대로 농밀한 분위기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카탈로그 자체에도 욕심이 있었던 터라 오히려 원통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코믹월드 같은 행사와 달리, 백합제에서 내놓은 카탈로그는 한 권도 버려지지 않았다. 디자인과 행사 컨셉의 대동단결로 인한 승리)
어쨌든 약속했던 대로 나머지 만원은 굳혔고, 소규모 동인 행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작은 공간과 간소한 부스라는 핸디캡을 오히려 최대한 활용한 행사였는데, 참가한 작가들이 행사의 컨셉에 '몸과 마음을 다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한(?????)' 역작들을 많이 내놓은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무튼 다음 주에도 이틀은 KTX 월말 알바로 죽어라 달려야 하고, 공포의 치과진료크리도 있고, 이런저런 학교 일도 있다. 그리고 알바의 수익금(???)은 언제나 그랬듯이 코믹용 지름비용으로 굳힐 생각이지만, 그것 외에 오히려 아마존에서 처음으로 CD 구매를 시도할 예정이라 돈 여유가 될 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포스팅 거리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유니크한 행사 마련해준 행사 운영진들과 참가자 여러분들께 굽신굽신. 2회 행사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