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촬물 팬들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작품으로 '고질라(1954)' 가 있다. 비록 흑백인 데다가 요즘 보면 고질라가 너무 인형같아 보인다는 불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이 일본 영화계만의 특수한 장르로 가는 지름길을 마련해 주었다는 역사적인 가치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고질라 시리즈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이후쿠베 아키라(伊福部 昭, 1914-2006)인데, 올해 90세 기념 콘서트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마뉘엘 로장탈(2003년 99세로 타계)과 에스파냐의 호아킨 로드리고(1999년 98세로 타계)에 이어 장수 작곡가의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이후쿠베는 홋카이도의 구시로에서 태어났는데, 고향의 아이누 설화와 민요는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에서 굳건한 뿌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0대 후반이 되어서였고, 그 전까지는 홋카이도 제국 대학교에서 조림학을 배우고 있었다.
이후쿠베가 소년 시절에 받은 음악 레슨은 바이올린 뿐이었고, 나머지 이론과 작곡법은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을 레코드로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세의 나이에 그의 출세작이 된 '일본 광시곡' 을 작곡했는데, 이 곡으로 러시아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체레프닌의 눈에 띄어 그에게 본격적인 교습을 받게 되었다.
이후쿠베는 소관현악 '아보리진 3부작(1937)', 신포니아 다프카라(1954), 바이올린과 관현악 '협주 광시곡(1960)', 피아노와 관현악 '오스티나토 리듬(1961)', 위에 언급한 '고질라' 의 주제로 작곡한 'SF 교향 환상곡 제 1번(1983)' 등 주로 관현악 음악에서 주목할 작품들을 많이 남겼고, 독주곡으로는 '일본 모음곡(피아노 독주. 1938)' 과 '고대 일본 선법에 의한 도카(기타 독주. 1967)' 등이 유명하다.
이후쿠베는 작곡 외에 저술과 교육 활동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데,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아쿠타가와 야스시가 있다-레어 애청곡선 5편 참조-. 그의 작품은 홋카이도의 민속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스트라빈스키, 버르토크 등의 현대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대단히 리드미컬하고 박력있는 것이 특징인데, 최근 일본이 공을 들여 진행하고 있는 낙소스의 '일본 작곡가 선집' 에도 '신포니아 다프카라' 와 '오스티나토 리듬, 'SF 교향 환상곡 제 1번' 이 담긴 앨범이 올해 말 발매될 예정이다.
1987년 9월 13일, 효고현의 이타미 시에서 개최된 '이타미 영화제' 의 프로그램에 이색적인 이벤트가 추가되었다. '이후쿠베 아키라의 영화음악과 클래식의 밤' 이라는 타이틀로 이타미 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연주회였는데, 김홍재 지휘의 오사카 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았다. 또 1부와 2부의 시작 전에 이후쿠베가 직접 감수한 작품 해설이 낭독되었고, 이후쿠베 자신도 연주회장에 청중으로 입회했다.
ⓟ 1993 VAP Inc.이 때의 녹음이 VAP에서 CD 두 장 세트(위 사진)로 나와 있는데, 지금은 폐반되어 있어서 일본 내에서도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비록 하루 동안의 연주회를 편집하지 않고 담은 탓에 금관의 '삑싸리' 등이 그대로 들어 있어서 연주의 완성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SF 교향 환상곡 제 1번' 과 신포니아 다프카라, 여기에 소개될 '희화된 론도(Rondo in Burlesque)' 와 발레 '살로메' 같은 관현악 작품을 연대별로 고루 들을 수 있고, 해설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다.
'희화된 론도' 는 원래 취주악과 다이코(일본 전통 북)를 위한 곡이었고, 1972년에 도쿄 고세이 취주악단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이후쿠베는 초연 뒤 이를 3관 편성의 관현악용으로 편곡/개정했고, 1983년에 'SF 교향 환상곡 제 1번' 과 함께 도쿄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했다. 같이 초연된 환상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도 '대괴수 바란', '프랑켄슈타인 대 지저괴수' 등의 자작 특촬물 음악에서 주제를 빌어오고 있다.
(뱀다리로, 주제들 중 하나가
나오키의 홈페이지에서도 BGM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곡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로 흐르는 환상곡과 달리, 이 곡은 론도라는 형식의 돌고 돌리는 묘미와 타악기를 동반한 (선동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리듬의 집요한 반복 때문에 무용음악이나 행진곡의 성격이 짙다. 제자인 아쿠타가와의 초기 작품에서도 이러한 단순 리듬의 강박적인 반복이 남용된다 싶을 정도로 자주 쓰이는데, 결과적으로 이후쿠베의 이름을 상당히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아동물' 로 수입된 이래 계속 'B급 영화물' 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특촬 장르인데, 일본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이 그 영화들에 스스럼없이 곡을 붙이고, 그 주제들로 새로운 연주회용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이웃의 토토로' 의 주제가 '산보' 를 일본 유치원생들이 소풍갈 때 부른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본의 영화/게임/애니음악이 대중화/일상화되어 있음을 절감케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