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공연 같은 포스터를 보면 항상 제일 크게 나오는 사람은 안무가 아니면 프리마 발레리나(혹은 발레리노)다. 춤을 반주해 주는 음악가나 단체는 포스터 아래쪽에 '짱박혀' 있거나, 심한 경우에는 생략되기까지 한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춤이라는 것에 천성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지금까지 발레 공연은 커녕 그 비디오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도 지금까지 전곡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에든 존재하는 법. 아직까지 공연은 본 적이 없지만, 발레 음악을 담은 음반은 몇 종류 갖추고 있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은 수업 시간 때의 분석을 위해 음반을 샀다가 거의 '중독된'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작품들을 발레용으로 편곡한 마뉘엘 로장탈의 곡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종종 듣고 있다.
고등학교 때 쇼팽 원곡의 발레 '르 실피드' 를 듣기 위해 나온 지가 꽤 된 CD를 한 장 샀는데, 오히려 '실피드' 보다도 더 많이 듣게 된 곡이 들어 있었다. 알렉상드르 뤼지니(Alexandre Luigini, 1850-1906)의 '이집트의 발레(Ballet égyptien)' 라는 작품인데, 발레곡으로서는 20분 약간 넘는 길이의 짧은 곡이었다.

ⓟ 1992 The Decca Record Company Limited뤼지니라는 작곡가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인데, CD 속지를 보면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작곡가로 리옹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877년에 고향의 그랑 테아트르(대극장) 지휘자로 부임했고, 1897년에는 파리로 상경해 오페라 코미크의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타계했다고 짤막하게 씌여 있을 뿐이다.
'이집트' 라는 제목 하면 흔히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이 발레곡이 작곡된 시기(1875)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 등 중동 관련 이슈가 많이 전해지던 때였다. 그리고 예의 '아이다' 가 리옹에서 공연되었을 때 2막에 뤼지니가 특별히 작곡한 디베르티스망-본 공연의 작품 스토리와는 별 의미가 없는 춤을 가리킴-을 삽입하는 것을 베르디가 허락했다고 한다.
극장에서 일생을 보내다시피 한 작곡가답게, 처음 1분만 들어도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발레곡' 이라는 특색이 쉽게 간파된다. 더불어 무대가 무대인 만큼 식민지 시대 서양인들이 좋아할 만한 이국 취미의 악상이 대부분인데, 발레를 보지는 못했지만 속지를 또 참고하자면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맞았던 륄리 류의 프랑스 바로크 발레 전통을 현대에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 이라고 되어 있다. 유명한 발레리나였던 안나 파블로바도 이 작품을 자신의 레퍼토리에 넣었다고 한다.
'아이다' 와의 상관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아마 이 발레도 오페라 못지 않은 스펙터클함을 강조해서 당대에 호평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전기 조명과 입체 무대가 도입되던 시기인 만큼 '볼 거리' 를 최대한 살려서 공연을 했다고 하니 당시 청중들에게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만큼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여흥을 위한 음악' 의 경우에는 항상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깊이가 없다' 라는 비판이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뻑적지근한 대작의 연속 공연 위주로 나가는 주류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곡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져 가는 것 같다. 더군다나 오페라와 발레라는 장르 자체가 '돈다발 분쇄기' 마냥 취급되는 것도 문제고. (실제로 이들 공연에서 흑자는 커녕, 본전이라도 건지면 무척 신기한 일이라고 한다.)
'봄의 제전' 이 발레 보다는 관현악 연주회에서 호평을 받듯이, 이 곡도 마찬가지로 리바이벌 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취주악단 용으로 편곡한 것이 종종 연주되며, 음반도 나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흥 음악' 을 독자적인 존재로 인정해 주는 그네들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 나라처럼 음악을 '순수음악' 과 '대중음악' 으로 나누고 후자를 구박하기에 여념이 없는 쪽에서는 생각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CD는, 작곡자 뤼지니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오페라와 발레 무대에 바쳐온 지휘자 리처드 보닝이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녹음한 것(데카)이다.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조안 서덜랜드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스타로 만들어 준 인물이기도 하고, 차이코프스키 등의 걸작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던 발레 작품들을 발굴해 음반화한 공적도 큰 사람이다. 음반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발레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는 몇 안되는 지휘자인데, 그러고 보면 극장 전문 지휘자의 부족이라는 현실도 이 곡이 우리 나라에서 인기가 없는 이유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